사이다 원균과 고구마 이순신

사이다 원균과 고구마 이순신

조진태 / 전임기자

 

 



사이다 원균과 고구마 이순신



 

임진왜란, 사이다와 고구마 이야기 셋 - 그 중 첫 번째

 


 

임진년(1592년)부터 무술년까지 7년 동안 지속된 전란의 참화 속에서 군왕 선조에게는 사이다와 고구마가 필요했습니다. 사이다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전황 속에서 가슴을 뻥 뚫어줍니다. 트림 한번 하고 나면, 몸에 당 성분만 쌓여가지만 여하튼 잠시나마 스트레스를 풀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고구마는 캐서 삶기는 불편해도, 그래도 먹어야 힘이 나서 피란을 가든, 싸움을 하든지 하겠지요. 다만 짜릿한 감동과는 거리가 먼 음식입니다.

 

전란의 중심에 선 군왕 선조의 입맛을 기준으로, 최고의 ‘핵사이다’를 꼽으라면 저는 원균을 추천하겠습니다. 선조의 아픈 곳을 정말 잘 긁어주면서, 듣고 싶은 말을 그때그때 시원하게 쏟아냅니다. 전란 초기, 왜병 수급에 목마른 선조는 머리 3개를 베어다 바치면, 형식상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간주하고 홍패를 주기로 합니다. 원균이 발 빠르게 움직여 화답합니다. 어차피 전란이 터지자 자신의 함대를 모두 자침시켜서, 휘하에 병력도 없는 상태니까요.

 

반파된 왜선에서 불에 타 죽었든, 해안에 떠밀려온 왜병이든 가리지 않고 수급을 베어 올립니다. 나중에는 전투가 벌어지면 이순신과 자연스레 업무가 분담되는데, 이순신이 왜선을 깨뜨리면 원균이 수급을 줍는 것이지요. 이순신 휘하 장수의 불만이 쌓입니다. 전공을 빼앗기니까요, 그런데 이순신은 “내가 너희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데, 수급 따위가 왜 중요한가?”고 장수들에게 반문합니다. 답답한 고구마 기질입니다.


그런데 초조한 선조에게는 원균이 주워서 올려 보낸 수급 하나하나가 사이다였을 것입니다. 그 취득 경위야 어떻든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니까요. 전과를 선전하기도 좋고요. 원균은 조정에 잦은 장계를 올리는데,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에 따르면, 아마 술을 마시면 호기를 잔뜩 부렸나 봅니다. 오죽하면, 군 최고사령부인 비변사에서는 “지휘계통을 무시한 장계로 군사 기강에 먹칠을 한다”고 분통을 터뜨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것이 선조에게는 밉지 않았나 봅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정신 승리에 대한 갈증을 그 때 그 때 풀어주는 묘한 중독성입니다.


선조와 조정신료들에게 이순신은 완전 고구마입니다. 그리고 휘하 수령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산도 시절, 둔전에서 거둬들인 군량미의 되질을 다시해서 수량을 맞추고, 우물을 파서 부엌까지 수로를 만들고, 수십 마리 청어를 일일이 세어 말리고, 미역을 따서 바닷바람에 널어놓고, 군사들과 메주를 담고, 이 과정에서 직무에 태만한 수령과 군관에게는 곤장이 떨어졌습니다. 친소(親疎)도 안 가립니다. 어제 함께 술 마신 수령도 오늘 일 못하면 때립니다. 

 

전투가  있거나 없거나 매일 척후선을 띄우고, 판옥선을 만듭니다. 수치에는 어찌나 밝은지, 하루는 선소에서 일하는 일꾼 수백 명을 헤아려보다 20여명이 비어있자, 군관과 아전을 불러 사정없이 혼을 냅니다. 즉각 불려와 다시 작업에 투입되지요, 유성룡의 징비록에 따르면 왜군이 감히 범할 생각조차 못했다는 살아있는 한산진의 군세가 입으로만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매우 디테일한 장수였습니다.

 

한산 수루가 화재로 소실되자, 포로로 잡힌 왜병을 시켜 다시 짓습니다. 조선 수군의 상징적인 장소, 왜병을 동원해서 전란으로 상처 받은 수군의 마음에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비오는 날, 머리와 옷이 모두 젖은 것도 알지 못하는 듯 깊은 상념에 빠져, 내항으로 향하는 좁은 포구 너머 봄비로 어두워진 외로운 섬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그도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구장창 고구마만 올려대는 이순신이 선조에게는 마뜩찮습니다. 그들은 최전선 전투  현장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니고, 일단 ‘출정과 승리 보고’가 필요했으니까요. 아니면 빈말이라도 가끔 사이다를 올려야하는데, 그런 정치 감각은 없었나 봅니다.

 

선조의 출정 지시를 정면으로 어기고, 마침내 선조 입에서 “한산도 장수는 편히 누워 있으니 왜장 고니시보다 못하다”는 한탄이 나오자, 신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호응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찬성 댓글과 ‘좋아요’가 수십만 개 붙은 것입니다. 다만 이순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체찰사 이원익이 결사적으로 변호하지만, 그는 조정이 아니라 전투 현장에서 군무를 관장하고 있어서, 악성 댓글 사이에 파묻혀 버립니다.

 

이렇게 고구마가 물러나고, 핵사이다가 해전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그 심정 이해도 가지만, 당대에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핵사이다 원균이 수군 통수권을 장악하고, 고구마 이순신이 판옥선에 갇혀 송환될 때, 조선 수군의 군세는 거북선을 비롯한 함선 3백여 척, 군량미만 1만여 섬에 이르렀습니다. 사이다 원균은 막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자, 잠시 고구마 흉내를 내지만, 타고난 기질이 디테일이나 소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풍랑 속에 출항을 결행하고, 패퇴한 함선을 좁은 칠천량에 가둔 채 척후선조차 띄우지 않고, 이도저도 못하고 술을 퍼 마시다, 조선 수군을 전멸시킵니다. 이른바 칠천량 해전의 비극이지요. 

 

임진왜란 사이다의 비극, 칠천량 해전의 모습[사진=칠천량 해전 박물관]

 

칠천량 해전,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사진=칠천량 해전 박물관]

 

살아남은 함선은 12척, 여기에 뇌물로 팔아넘긴 판옥선 한 척이 회수되면서 13척이 진도 벽파진 울돌목에 포진해 정유년 9월 16일 새벽,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왜선 133척을 맞아 생사를 건 전투를 준비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 말은 가벼운 사이다 발언과는 거리가 멉니다, 실제 죽어야 하니까요. 왜선은 지휘관이 사이다에서 고구마로 바뀐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덤벼들다 임진년 이래 겪은 해전의 악몽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부랴부랴 도주합니다.

 

사실 살면서, 사이다도 필요하고, 고구마도 필요합니다. 사이다 없는 고구마는 목이 메고, 고구마 없는 사이다는 공허하지요. 그런데 사이다는 늘 입맛에 맞습니다. 찰나적인 인터넷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선조 또한 전란이 끝난 뒤, 원균을 선무공신 1등에 올립니다. 사이다의 중독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핵사이다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한산진의 군세는 절대 만들 수 없습니다.

 

 - 조진태, ‘난중일기-종군기자의 시각으로 쓴 이순신의 7년 전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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