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번역을 둘러싼 흑백논쟁, 백인은 흑인의 시를 번역할 수 없나?

시 번역을 둘러싼 흑백논쟁, 백인은 흑인의 시를 번역할 수 없나?

조광태 / 전임기자

흑인의 고난한 삶을 살아보지 못한 백인은 흑인의 시를 제대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일까? 네덜란드에서 시 번역을 둘러싼 흑백논쟁이 일고 있는 가운데, 다른 유럽 국가로까지 이 논쟁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 1월 20일 미국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22세의 흑인 여성 아만다 고먼(Amanda Gorman)씨는 우리가 오르는 언덕(The Hill We Climb)라는 제목의 시를 낭송했다. 흑인으로서 슬럼가에서 편모슬하에 살았던 고먼 씨는 어렸을 때 언어장애가 있었던 탓에, 정신지체로 오인을 받는 등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낭송 시는 그녀의 어려웠던 삶과 맞물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곧 세계 각국에 번역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에서 이 시의 출판을 맡게될 몰렌호프(Meulenhoff)씨는 자국의 유명 작가이자 번역가인 29세의 여성 마리케 루카스 리흐네벨드(Marieke Lucas Rijneveld) 씨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이에 대해 고든씨와 그녀의 관계자들은 의뢰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평소 성적 소수인 여성에 대한 마리케씨의 입장에 편파성이 없었다는 점이 작용했다.


3월 23일 마리케씨는 자신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번역자로 지명된 것에 대한 즐거음을 표명했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네덜란드의 현역 기자이자 활동사인 제니스 덜(Janice Deul) 씨가 마리케씨를 번역인으로 지명한 것과 관련,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반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이기도 한 제니스 덜 기자는 일간지 데 포크스크란트(De Volkskrant)의 컬럼을 통해 이 지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좌절, 분노와 실망을 야기시켰다”면서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리케씨 자신이 흑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슬럼가의 생활, 편모슬하, 어릴 적 언어장애, 이런 것들은 흑인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정체성을 명확하게 나타내주고 있는 것인데, 다른 삶을 살아온 백인 여성이 번역과정에서 이러한 삶의 과정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겠냐는 주장이었던 것. 그녀는 마리케씨 대신에 젊은 흑인 여성을 선택했어야 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개인적, 문화적 배경, 슬럼가에 대한 몰이해, 영어의 부족,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해볼 때 이 번역은 마리케씨에 너무 벅차다고 단정을 짓기까지 했다.


논란이 일자 마리케씨는 지명 3일만에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이 이 번역을 맡지 않을 것임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구체적인 사유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몰렌로프씨가 받은 압력이 그 원인이었음은 당연하다.


네덜란드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이 얘기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모로코 출신이자 플랑드르에서 작가활동을 하고 있는 모하메드 우아마리(Mohamed Ouaamari)씨는 벨기에의 일간지 드 모르겐(De Morgen)지에 “문제는 완전히 백인들의 문학 영역이랄 수 있는 시의 분야에서 소수의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없다는 데에 있다”면서 시 문학계가 갖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글의 가치는 펜에서 나오는 것이지 피부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면서 제니스 덜 기자를 비판하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또 다른 앙베르의 시인 세꼬우 올로금(Seckou Ouologuem) 씨는 “몰렌호프씨가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이 갖는 엄청난 상징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서 “아만다 고먼씨와 같은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백인 시인이 시를 너무 아름답고 깨끗하게만 번역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제니스 덜 기자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또 다른 작가 가이아 슈어터(Gaea Schoeters)는 “삶의 배경이 잘 맞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자칫 이 과정은 여성의 시는 여성만이, 흑인의 시는 흑인만이, 백인의 시는 백인만이 번역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도스토 예프스키 작품 번역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번역가 앙드레 마크위즈(André Markowicz) 씨 역시 프랑스의 르몽드(Le Monde) 신문을 통해 “그리스 정교 신자가 아니면 그리스 정교와 관련이 깊은 도스토 예프스키 작품을 번역할 수 없는 것이냐?”는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또한 “번역은 오히려 서로 몰랐던 세계를 수용해 가는 과정”이라고 언급하면서 제니스 덜 기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가운데 몰렌호프씨는 시의 번역을 위해 새로운 흑인 그룹을 물색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벨기에 국적의 콩고 출신 흑인 여성인 마리 삐에라 까꼬마(Marie-Pierra kakoma)씨가 번역을 맡기로 해 애초에 백인 번역인 논쟁에서 벗어난 상태다.

 

일각에서는 흑인의 시를 백인이 번역할 수 없다는 발상 자체가 증오와 경멸의 반사작용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가운데, 흑인의 삶을 살지 못했던 백인이 흑인의 시를 다른 언어로 옮기기에 덜 적합한 것인지의 여부는 당분간 논란상태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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