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윤휴에 관한 역사서(이덕일)를 읽고

백재선 기자의 책읽기 산책

송시열과 윤휴에 관한 역사서(이덕일)를 읽고

백재선 / 전임기자

조선 숙종 시대는 유학자들이 서로 싸우면서 승자는 패자를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사화(士禍)가 극심한 시기였다. 조선 건국 철학인 성리학을 똑같이 공부했던 유학자들이 오로지 권력 쟁취를 위해 혈투를 벌인 것은 아무리 왕조 시대라고 해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덕일 사학자는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윤휴, 금기어가 된 조선 유학자』 라는 역사서를 통해 16세기 효종·숙종 시대 당쟁과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한 갈등과 대립을 보여 준 두 인물을 조명한다.

 

송시열은 인조 반정 후 효종 숙종 시대 집권당인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활동했고 숙종 시대에는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윤휴는 오랜 야인 생활에서 숙종 초기 한때 남인의 집권 이후 등용되어 북벌과 개혁 정책 시행을 내세웠지만, 그의 정책은 서인 등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숙종 시대 잇따른 사화로 인해 반대당의 주청으로 모두 사형을 당하는 비운의 인물들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효종 시대에 추진하려 했던 북벌정책과, 효종과 숙종 시대 상례(喪禮) 문제를 둘러싼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크게 대립하여 남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부상했다.

 

저자는 특히 북벌정책과 예송 논쟁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을 기존 주류 학계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어 관심 있게 읽었다.

 

내가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서 배우기로는 효종 시대 송시열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을 주장하는 충직한 신료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의 책에서는 송시열은 말로만 북벌을 주창하고 북벌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인물로 기술된다. 반면 오랫동안 재야에서 살아온 윤휴는 숙종의 간곡한 요청으로 관직에 오르자 평소의 소신인 북벌을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제시했다.

 

윤휴의 북벌 정책은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과 일부 남인 세력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집권층을 이룬 사대부 세력들은 말로는 배청숭명(背淸崇明)을 외쳤지만,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파병을 극구 반대했다. 실제적 북벌론자인 윤휴가 죽은 후에 송시열의 당인 노론은 윤휴가 아닌 송시열을 북벌론자로 추앙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노론 세력들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음에 따라 송시열이 북벌 주창자라는 진실과 동떨어진 논리를 반복적으로 주입한 것이고, 여기에 일부 역사학자들이 놀아남에 따라 오늘날 국사 교과서에까지 실려 역사적인 진실이 된 것”이라고 밝혔다.

 

저자는 효종과 숙종 시대 두 차례의 예송 논쟁에 있어서 송시열과 윤휴의 입장을 당파의 대변자로 다루는 기존 사학계의 해석에서 벗어나 보수와 개혁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한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들은 효종을 인조의 장자가 아닌 서자로 인식하고 상례를 왕가의 규율이 아닌 사가의 규율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세운 반면 윤휴는 왕권의 정통성을 위해 왕가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 주자학에 입각한 송시열은 신권(臣權) 중심의 정치 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수구 보수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라면 반주자학을 표방한 윤휴는 군주권(君主權)의 강화를 통해 백성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진보 개혁적 견해를 표출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왕실로 하여금 사가의 예법을 적용하면서 사대부들의 계급적 이익을 더욱 강화하려고 한 것”이라면서 “송시열 등 서인들이 후기 성리학의 중심 이론을 예론으로 가져간 이유는 양란 이후 흔들리는 신분제 질서를 고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윤휴는 나라보다 당이 국왕보다 스승이 중시되는 시대를 개탄하고 백성을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 이외의 천하라고 여기고 계급적 차별을 거부하기까지 했다”고 강조한다.

 

윤휴는 민생을 위해 호포법과 함께 지패법과 오가통법을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비제 개혁을 통해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신분제에 대한 해체 내지 완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신분제의 틀이 흔들리는 것은 사대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개혁안은 제대로 논의도 되지 않고 조선 후기 들어 예론이 성리학의 종주가 되면서 사회적 요구와 시대적인 흐름과 거꾸로 오히려 신분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들을 산림처사를 자처하면서 왕의 부름이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행동이 아닌 목소리만 내세우고 당파 세력의 이익을 도모하기에만 힘을 썼다. 이들은 민생을 살리기 위해 사대부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대동법·호포법 등 개혁 정책 시행에 건건이 반대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안간힘을 쏟았다.

 

더욱이 서인 세력들은 주자학의 전통적인 해석을 달리하는 유학자들을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적자인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매도하고 죄를 묻기까지도 했다.

 

학문이나 사상에 있어 완고한 송시열과 달리 유연한 윤휴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뛰어넘어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고대 孔孟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송시열은 윤휴가 경전을 주희와 다르게 해석하고 주희의 중용 장구와 주석을 고치자 그를 사문난적이라고 거세게 내몰았다.

 

윤휴는 환국 당시 드러난 죄가 없었지만, 송시열 등 서인 세력들의 미움을 받아 결국 사형을 당했다.

 

숙종 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지만, 송시열을 교종(敎宗)으로 삼은 노론 세력들은 이미 없어진 명나라 황제를 붙들고 제단을 쌓고 숭배하는 사대(事大)의 정점을 드러냈다.

 

저자는 송시열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 이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고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내린다.

 

저자는 “송시열이 활동할 무렵 주자학은 조선에서 이미 그 순기능을 다한 학문으로 사대부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주자학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면서 “유학의 진정한 조선화는 송시열이 주창하는 소중화(小中華)가 아니라 양반 사대부 중심의 중세 유학을 농민을 포함하는 일반 양인 중심의 근세 유학으로 바꾸는 것이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윤휴에 대해서도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타협을 해서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노력을 보였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유학자들 간의 갈등은 오늘날에는 권력 쟁취를 놓고 진보와 보수 간 극한 대립에서 여전히 드러나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지금도 사회 엘리트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상대방을 비방하고 헐뜯는 데 혈안이 되고 있다. 그들에게는 사회 공동체를 위한 타협은 없고 당파의 이익만 도모하고 있다. 국가의 장래 비전과 국민의 민생 안전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권력 쟁취를 위해 정쟁을 일삼는 지금의 정치 세력들은 조선 시대 사대부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만 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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