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헬레나 로젠블렛』를 읽고

백재선 기자의 책읽기 산책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헬레나 로젠블렛』를 읽고

백재선 / 전임기자

최근 들어 자유주의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너무 혼란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우리 정치권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그 개념이 역사적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마저 자유주의가 모호하고 명확히 소통하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정치가들이 진영논리로 당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의미로 그 용어를 활용할 때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기만 하다.

 

역사학자인 헬레나 로젠블랫은 『자유주의 잃어버린 역사』라는 책에서 자유주의 기원을 알아내고 역사적으로 그 개념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추적한다.


자유주의(liberalism)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고대 로마 시대부터 liberal이라는 단어는 있었다. liberal은 본래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와 타인을 위해 후하게 베푸는 것을 의미했다.

 

20세기 이전 거의 2000년 동안에는 리버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베풂을 실천할 줄 알고 공민적 정신을 가진 시민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존재임을 이해하고 공공선에 보탬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이익 보호에 방점을 두는 현재의 자유주의 개념과 아주 달랐다.

 

흔히 영국의 존 로크나 J, S. 밀로부터 근대 자유주의의 전통을 찾으려고 하지만 저자는 “자유주의라는 말이 생겨나고 발달한 곳이 프랑스였다면 반세기 뒤에 자유주의 개념을 재구성된 곳이 독일”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에 기원을 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구성된 국민회의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프랑스 인권선언)에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러한 존재임에 변하지 않으며 정부의 목적은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선포했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정세가 반혁명 반란과 공포 정치로 요동을 치는 가운데에도 개혁적 인사들은 대혁명의 성과들을 지켜내고 이를 좌우와 위아래의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자유주의 원칙을 내세웠다.


리버럴의 원칙들은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공화정을 지키는 것, 법치와 공민적 평등을 지지하는 것, 입헌 정부와 대의제 정부를 지지하는 것,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제반 권리들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1811년이 되어서야 만들어졌으며, 이 단어가 지칭하는 개념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사람들은 라파에트, 뱅자맹 콩스탕과 마담 드 스탈이었다.


그 당시 모든 자유주의자가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단순화겠지만, 그들이 가장 맹렬히 맞서 싸운 대상은 반혁명 세력과 종교적 정치적 보수세력이었고 그들 사이에서도 자유주의를 놓고 많은 논쟁을 벌였다.


그렇지만 19세기 자유주의자 대부분은 이전 시기의 리버럴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익과 권리를 옹호하는 것을 이기심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여겼고 자신들은 공공선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다.


유럽에서는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등장해 자유주의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라는 개념도 탄생했고 이들 개념은 상호 부침 속에서도 혼용되어 결국에는 각 국가의 정부 체제를 구성하는 원칙이 되었다.


미국이 자유주의 개념사에서 지분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20세기 초기 미국에서는 자유주의는 미국의 세계 패권이라는 개념의 휘장을 두르고 미국 특유의 사조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교회와 학계를 중심으로 자유주의가 허무주의와 전체주의로 가는 문을 열었다는 비난이 제기되자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사회 재건 계획의 어조를 낮추고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데 헌신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처럼 자유주의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타자로 재정의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의 핵심 목표인 도덕성과 공공선에 대한 헌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개인주의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앵글로-아메리칸 자유주의 전통은 지나치게 개인의 권리 개념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라면서 “권리 기반으로의 전환은 양차 대전과 냉전의 결과로 발생했다”라고 강조한다.


개인의 권리와 이익 옹호를 자유주의 핵심 가치라고 여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개인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형성해온 자유주의의 개념은 점차 잊혀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선택을 압도적으로 많이 강조하는 반면 의무, 애국심, 자기희생,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 등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유주의의 핵심 원칙이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데 방점을 두면서 자유주의를 지지하든 비난하던 것과 상관없이 정부는 개인의 권리와 이익과 선택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유주의 역사에서 간과되곤 하지만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대부분의 자유주의자가 도덕적인 지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라면서 “그들이 생각했던 자유주의는 오늘날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으레 연상시키는 원자화된 개인주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이 권리를 갖는 것은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기주의의 위험에 대해서 끝없이 경고한 반면에 원활한 공동체 구성을 위한 관대함, 도덕적 고결성, 시민적 가치 등을 옹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목적이 공공선에 복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초창기에는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제도를 해체하려 했고 나중에는 금권 정치와 여기에 수반되는 착취에 맞서 투쟁해온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20세기 이후 자유주의가 신조가 된 미국에서도 건국에 토대가 되었던 가치를 놓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보고 그 차이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자유주의를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이데올로기이며 사적인 권리를 강조하는 사상이라고 대체로 이야기한다.


저자는 자유주의 역사에 대한 논의를 재설정하고 촉진할 필요가 있다면서 책 발간에 따른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밝힌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서구의 지배적인 정치 사조로 널리 여겨지지만 승리주의와 함께 염세주의가 공존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들을 회복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전통의 지적 원천들과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책을 읽고 나니 요즈음 우리 정치권에서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남발이 아니라 남용되고 있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서구의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닌 자유주의를 우리 사회가 미국식의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일방적인 가치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무지하기도 하고 반지성적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원래 관대함, 너그러움. 공동선을 추구하는 가치였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특정 계층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수호하는 의미로 변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특히 정권 차원에서 자신들의 정권 유지와 기득권 보호를 위해 자유와 평등,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온 사람들을 자유 수호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매도하는 것은 자유주의 본래 개념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유주의 역사는 사회가 더 평등한 토대를 갖는 방향으로 진보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적 연대를 위해 국가의 책무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자유주의 역사 변천에 따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자유 수호 명목 아래 과거 역사를 부정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려는 것은 결국 전제주의로 가겠다는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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