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김기협)』
제주 4.3 사건은 좌익세력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건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왔다. 70여 년 전 제주도민들은 해방 이후 반도의 어느 지역보다 민족의식이 높았고 자치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제주도민의 이러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한 미군정과 군·경세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land)로 매도하고 성인 남자는 물론 노인과 어린아이, 여자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4.3 사건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으로 사과했다.
제주 4.3 사건은 60년이 지나서야 사건 발발에 대한 진상이 밝혀졌지만, 반공 보수와 극우 세력들은 오랫동안 진상 조사를 반대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 계속 반발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베이비붐 세대인 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반공에 입각한 역사교육을 확실히 받았고, 대학교 때에는 군대에 가기 전에 문무대 입소로 병영 생활을 미리 체험해야 했다.
재야사학자인 김기협이 쓴 『해방일기』는 해방 이후 미군정 체제하에서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극우와 극좌로 갈리고 결국에는 한반도가 분단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해방일기』는 독특한 형태의 역사서이다. 저자는 해방 후 3년 동안 주요 사건을 일자별로 정리했다. 기존의 역사서는 물론 당시의 신문 기사와 정부 문서의 자료, 주요 인물 평전 등에서 관련 자료를 있는 대로 찾아 해방 이후 한반도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술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해방 이후 주요 사건의 추이 전개와 함께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동향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은 준비 없이 해방을 맞게 되면서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념적으로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국과 소련 간의 본격적인 냉전 돌입으로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저자는 해방 이후 외세의 친탁 통치를 놓고 우리와 오스트리아의 엇갈린 행보에 대해 언급한다,
연합국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과 오스트리아를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에서 각각 분리 독립시키기로 확정하고 독일을 크게 도와준 오스트리아는 10년, 조선은 5년 동안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정했다.
오스트리아는 10년 신탁통치를 군말 없이 받아들여 1955년 좌우합작 정부 수립을 통해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반면에 조선은 좌익과 우익의 극렬한 대립과 미소의 지나친 간섭으로 결국 남북이 각각 정부를 수립해 분단되고 말았다.
저자는 좌우익 대립과 분단 과정에 일차적으로 미군정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다.
미군정은 조선인의 자치 노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체제로 복원하려 했다. 특히 식민지 체제 청산의 시대적 과제에 역행하는 친일파 집단에 행정과 치안을 맡기는 잘못을 범했다. 미군정 관리들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극우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미국이 미소공위에서 조선 통일 문제를 다루지 않고 유엔에 가져간 것은 책임 회피에 불과했다. 유엔이 결정한 가능 지역 선거는 결국 미국이 바라는 대로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에 이어 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낳게 하였다,
책은 한반도가 분단으로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국내 주요 인물들의 행태를 입체적으로 조명해준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친일파와 먼저 손을 잡았으나 미군정 관리들과 불화를 겪자 미국 내 극우 인사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하지 장군이 중도파인 안재홍과 김규식을 남조선 과도정부 수반과 입법의원 의장으로 임명하자 이승만은 미국으로 달려가 미국 내 극우파들을 대상으로 치열한 로비를 펼치면서 중도파 인사들의 좌우합작 노력에 제동을 걸었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모윤숙이라는 미인계를 써서 유엔한국위원회 인도인 메논 단장을 매수했다는 내용은 이승만의 퇴보적인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송진우․김성수 등 한민당 계열 친일파 인사들은 미군정과 밀착 관계를 맺으면서 해방 전 일제가 부여한 기득권을 그대로 누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아일보는 미국 반탁 반대, 소련 신탁 찬성이라는 왜곡된 기사를 실어 여론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극우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에만 지면을 할애했다.
당시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들은 맹목적으로 미군정을 추종하면서 군사정부까지 이어온 경찰 권력의 인권 무시와 민주주의 유린 악습의 원조가 되었다.
이들은 미군정의 협력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경찰을 대부분 채용하고 좌우익 인사들을 탄압하고 정당한 사회운동을 탄압하는 전형적인 미군정체제에서 경찰국가의 하수인으로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저자는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해방 이후 행보에 대해서 비판한다.
김구는 미군의 견제로 환국이 늦어지면서 국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승만과 한민당의 속셈에 빠져 맹목적으로 반탁운동으로 나섰다.
김구가 우익 노선으로 급격히 선회하면서 해방 전에 맺어졌던 임시정부 좌익과 우익의 결합이 허물어졌으며 결국에는 민족주의자로서의 그의 위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이 마지막 남북한 분단을 막기 위해 납북 협상에 매진했으나 해방 이후 그의 갈팡질팡한 행보에 대해 완전무결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받들어 보던 우리 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뺄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뼈아픈 지적이다.
저자가 해방공간에서 높게 평가한 인물들은 좌우익 합작에 나선 여운형․김규식․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다.
여운형과 안재홍 등 중도계 인사들은 해방 후 발 빠르게 움직였으나 처음에는 미군정의 비협조로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고, 시간이 지나서는 극좌파와 극우파들에게 배척을 받으면서 정국 주도권을 상실했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려는 중도파는 이해관계와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파와 극우파에 밀려 해방공간에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저자는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적 정치노선이 힘을 키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 작업에 임했다”면서 “김두봉․김규식․안재홍․홍명희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라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저자는 안재홍과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그가 제안한 신민족주의 의미를 짚어보고 우익에 속하면서 좌익을 배제하지 않은 중도 우파의 입장을 설명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상황은 해방 이후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일본을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중국-러시아를 축으로 하는 공산 사회주의 체제는 한반도에서 각각 남한과 북한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지금까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해방 이후 조성된 정국 지형 구조도 분단체제가 이어지면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 우익인사들은 아직도 남한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 친일 친미 사대주의로 일관하고 민족 통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으며 북한과 대화에 나서려는 사람들을 좌익세력으로 매도하고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해방 이후 극우와 극좌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오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일부 지식인 집단은 이 같은 분단체제를 고착화하고 지배층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마저도 왜곡하려 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70년 전 수립된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에도 날쌘 칼을 세운다.
뉴라이트 계열 사학자들은 민족의 정통성을 찾는 데 관심이 없고 이민족의 신탁통치와 폭압적 독재정치를 미화시키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임시정부의 법통보다 유엔 승인 하의 단독정부 수립에 찾고 있으며 친일과 친미에 매달리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현대사 인식에 부족함이 많은 이유로 식민통지와 독재정치의 억압만을 생각했으나 군사독재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상식과 직관에 어긋나는 기인한 주장을 펼치는 뉴라이트가 활개 치는 것을 보며 우리의 오만한 믿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저자의 이러한 입장에 십분 공감한다. 역사서에서 단순히 사건만 나열하거나 양시론ㆍ양비론 입장에서 관점을 전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되거나 해석된다는 점에서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갖고 역사를 기술하고 이에 대해 독자들의 평가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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