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조약 강제와 저항의 역사/이태진』를 읽고

백재선 기자의 책읽기 산책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조약 강제와 저항의 역사/이태진』를 읽고

백재선 / 전임기자

 8월 29일은 庚戌國取일.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잉여함을 규정한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이를 공포한 날로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의 국권이 상실되는 치욕적인 날이기도 하다.


서울대 이태진 원료 교수는 2016년 집필한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에서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서부터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저지른 강제·기만·범법 행위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과의 조약 강제 과정에서 남긴 요건 불비와 범죄적 행위가 연구 결과를 통해 샅샅이 드러난다.


일본 메이지 정부 수뇌부는 1905년 러시아가 당시 한반도에 침략할 의사가 전혀 없었음에도 한반도에서 러시아 침략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 메이지 정권은 러일 전쟁이 승리하자마자 대한제국과 보호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일본제국 수뇌부는 한국 군중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포고하고 중무장한 군대를 한국에 배치했다.


일본 제국주의 수뇌부는 한반도에서 무력 동원 체제를 확고히 갖춘 다음 보호 조약 체결을 위해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했다.


고종 황제가 조약 체결을 반대하자 이토 히로부미 조선 통감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과 모진 공작과 음모 활동을 펼쳤다.


연구서에 따르면 1905년 을사조약 당시 고종 황제가 국가원수로서 조약을 승인하는 비준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고 보호조약의 원본에는 조약의 명칭이 쓰일 첫 행이 비어 있었다고 한다.


이름도 없고 비준서 없는 조약으로 한국인들은 40여 년 동안 일제의 강압 정치에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시기를 보낸 것이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순종에게 양위하도록 겁박했다.


일제 관리들은 1910년 한일 병합 협정서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서류 위조라는 국제 협정 시에 찾아볼 수 없는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다. 그들은 협정 체결 과정에서 황제의 어새를 탈취하고 황제의 서명을 위조하는 날조극을 벌였다.


이태진 교수가 규장각에 수장된 대한제국 정부 문서를 검토한 결과 순종 황제의 조칙, 칙령, 법률 등의 문건 60여 점에서 일제 관리들에 의해 위조 서명이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일제는 한일합병 칙서를 일본에서 작성해 순종 황제에서 서명을 강요했으나 황제가 거부하자 이완용 총리대신과 데라우치 통감 간의 서명으로 갈음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관리들은 조선 식민지 체제를 구축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불법을 가리기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선 총독에서 총리가 된 데라우치는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등장으로 민족자결주의 요구가 높아지자 고종황제에게 재위 중 거부했던 을사보호조약을 추인하는 문서 서명을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살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총독부 앞잡이들이 고종을 찾아 데라우치의 요구를 전달했으니 고종은 이를 거부했고 고종은 얼마 되지 않아 전신이 부풀어 오른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순종 황제도 일본의 감시로 궁궐에서 17년 동안 유폐 생활을 하다가 1925년 죽기 전에 “병합 인준은 내가 한 것 아니다”라는 밀지를 측근에게 보냈다.


보호조약이나 병합조약 과정에서 드러난 일제의 기만과 만행은 다른 식민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악질적이었다. 일제 관리들은 조선 병합 과정에서 저지른 불법과 범법 행위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은폐를 시도했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에 대해 일찍이 미국 하버드대학 법대 연구진은 무력 동원과 위협에 의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은 법적으로 효력을 가질 수 없는 조약이라고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조선 강제 점령에 대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기네 선조들이 집요한 공작으로 형식상으로나마 조선 병합 작업을 마무리했으니까 후손들은 계속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조차 도덕적으로 불의하고 부당하지만,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952년 미국 주도로 연합국과 일본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전쟁 발발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않았다.


식민지국들의 재산 권리문제는 해당과 일본이 특별 약정으로 처리한다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4조 규정에 따라 우리나라는 전쟁 배상도 식민지 배상도 아닌 단순히 채무 관계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1965년 한일 체결한 청구권 조약을 체결했다. 일제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고 3억 달러 무상자금과 2억 달러 차관을 받고 조약에 서명했다.


1990년대 들어 위안부 강제 징용 문제들이 제기되자 무라야마 총리 등 몇몇 일본 총리들이 식민지 시대에 여러 번 사과를 표명했으나 조선 병합과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다.


2017년 한국 대법원의 일제 전범 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일본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 자민당과 극우세력들은 극렬히 반발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일본의 영향력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만, 자민당 집권 세력들은 평화 헌법 개정을 통해 오히려 과거 체제로 돌아가려는 반동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일본 아베 총리는 2019년 극우 반동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소재 부품의 對韓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하는 경제전쟁을 도발했다. 일본의 기습적인 도발은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국산화 노력으로 서서히 극복하면서 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점차 줄이고 있다.


한일 간 대립과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한국 정부를 질책하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있다. 그들은 한일 간 진정한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일본 입장을 두둔하려 하고 있어 개탄에 마지않는다.


일부 대학교수들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종족주의 이념을 내세워 우리 내부의 반일 세력을 비판하고 일본 극우세력들을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 일본의 자금 지원을 받아 작성한 연구서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고, 위안부 동원이나 강제 징용 등과 같은 일제의 만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철면피한 세력들이다.


물론 이러한 엄중한 시기에 오로지 일본 배척과 타도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처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인들도 경계해야 한다.


과거를 망각하려는 사람들에는 당연히 미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미래의 발전은 과거의 슬픈 역사를 극복하고서야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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