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중개사 비밀일기] 공인중개사의 공휴일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양자역학은 물론 이해하기 어렵다. 공인중개사처럼 이과가 아닌 문과 출신들에게는 한층 더 그렇다. 다만 문과출신들은 어려운 이과의 이론들을 채치있게 삶의 이야기로 바꾸는데 능하다. 물론 그 바꾸는 과정이 이론을 올바르게 적용시켰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이과생과 문과생의 대답은 사뭇 다르다고. 이과생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대답한다. 문과생들은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대답한단다. 전자의 대답이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근간이라면, 후자의 답은 우리의 삶을 정신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근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양자역학을 문과적 실력으로 대충 이해한 바에 따르면, 존재는 인식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고, 또한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시간의 존재는 시간을 인식하는 존재가 있을 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인식에 의해 존재하는 대상은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너무 유명해져서 누구나 다 아는 얘기가 돼 버렸다. 상자 안에 고양이와 두 개의 버튼이 있다. 하나의 버튼을 누르면 먹을 것이 나온다. 다른 하나를 누르면 독가스가 나온다. 버튼은 한 번만 누를 수 있다.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 상자 안의 고양이가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면, 상자를 열기전에 고양이는 죽어있으면서 살아있는 중첩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인가? 슈뢰딩거의 사고실험은 양자역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주창자들 답변 또한 간단치 않다. 그렇다는 것이다. 상자를 열기 전에 고양이는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중첩적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자를 열어 확인 하는 순간, 그러니까 누군가가 상자 안의 상태를 인식하는 순간, 그 때 비로소 고양이는 죽어 있거나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순적 주장인 것 같지만, 반론은 오히려 쉽지가 않다.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에 상자 안의 고양이가 중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주장한다손 치더라도, 증명까지 해낼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양자역학 주창자들이 말장난을 한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원래 철학이라는게 다 그렇지 않은가? 설령 우리의 직관이 저것은 뭔가 완전치 못하다고 우리에게 속삭이더라도, 반증을 쉽사리 제기할 수 없는 명제들을 생산해내는 자들이 바로 철학자들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제 다시 문과적인 얘기로 되돌아가서
공인중개사의 공휴일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엊그제처럼 5월 5일은 일요일이 아닌 공휴일이다. 공인중개사는 잠시 갈등한다. 오늘 출근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루의 휴식을 취할 것인가? 이번 어린이날에 나는 휴식을 취했다. 집 안에 나이와 상관없는 어린이가 하나 있기 때문.
그런데 만약 내가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휴일에 적어도 한 건의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을까?
어느 날엔가 나는 그 계약의 성사가 마치 상자 속에 갖힌 고양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는 공휴일에 계약의 성사는 있고 없음이 중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계약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그 계약은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내가 그 공휴일에 출근을 해서 하루를 근무하는 일은 그 상자를 여는 일과 같다는 것. 상자를 열고 나면 비로소 그 고양이가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다는 것.
상자를 열었을 때, 살아있는 고양이를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반대로 죽은 고양이를 보게 되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나에게는 살아있는 고양이를 만났을 때의 반가움보다는 죽은 고양이를 보게 될 때의 실망스러움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되는 탓에 일요일이 아닌 공휴일은 쉬는 것을 원칙으로 해오고 있다. 어린이날에 집안에 나이와 상관없는 어린이가 있어 쉬었다는 말은 그냥 핑계일 뿐.
물론 살아있는 고양이를 만날 때의 기쁨은 매우 크다. 12월 24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 날의 일이었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25일보다 이브인 24일이 더 즐거운 법. 나는 그 날의 일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말이고, 하루 종일 손님도 없었던데다가 이미 밤이 일찍 다가오는 12월의 저녁 6시였으므로 더 이상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딱 30분만 더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하기로 했다. 30분 동안 나는 살아있는 고양이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역시 죽은 고양이었음을 확인하고 집에 갈 것인가?
놀랍게도 나는 그날 살아있는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큰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비록 작고 왜소한 고양이었을지언정 그 고양이는 나를 기쁘게 했다. 고양이 실험 만세 !!!
일요일이 아닌 공휴일에,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고 쉬면서 가끔씩 생각을 해본다. 오늘 내가 상자를 열었다면 고양이는 살아 있었을까? 살아 있다면, 그 고양이는 큰 고양이일까? 작은 고양이일까? 혹은 고양이가 두마리였을까?
물론 모두가 상상속의 고양이들 뿐이지만, 나는 이런 상상이 재밌다. 중첩적으로 존재하는 상태, 상자를 열고 확인하고 나서야 확률적 불확실성을 딛고 살아있는 고양이든 죽은 고양이든 어느 한 쪽으로 존재하게 되는 상태, 내가 어느 틈엔가 슈뢰딩거보다는 양자역학 주창자들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은 이런 상상놀음이 주는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결국 공인중개사의 휴일은 계약성사 여부가 중첩적으로 존재하는 상자를 끝내 확인하지 않은 채 보내는 하루인 셈이다. 어쩌면 뚜껑을 열어 생사를 인식하지 않았으니 그 고양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c) 청원닷컴,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