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1코스(모슬포-무릉)

백재선 기자의 여행길 이야기

제주 올레 11코스(모슬포-무릉)

백재선 / 전임기자

올레길 11코스는 모슬포 하모체육공원에서부터 시작한다. 올레길은 모슬포항으로 이어졌다. 모슬포항은 제주 전형적인 포구로 어선들이 바람을 피해 방조제 안쪽으로 기항해 있다. 올레길은 모슬포항에서 5일장 시장을 거쳐 해안도로 향했다.

 

 

 

 

 

해안도로에서 바다를 보니 가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모슬포에 겨울바람이 거세다고 하나 고온의 날씨인데다 바람마저 잔잔해 걷기에 좋았다. 해변도로 인근에는 다른 포구와 달리 음식점이나 카페는 별로 보이지 않고 민가 주택이 많아 차분한 느낌이다.

 

 

 

 

 

올레길은 큰 도로를 건너 모슬봉으로 향했다. 모슬봉은 높은 편이 아니지만, 인근에 높은 산이 없어 모슬포에서는 물론 대정 일대에서 정상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산꼭대기에는 군 레이더 기지가 있어 쉽게 눈에 띈다.


올레길은 모슬봉 왼쪽 기슭으로 향했다. 산 쪽으로 들어가려 하자 바로 공동묘지가 나왔다. 공동묘지 입구에 놓인 돌의자와 탁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모슬봉 정상 주변이 군사 지역이라 올레길은 정상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우회해서 산기슭을 따라 빙 둘러 가고 있었다. 올레길 주변은 온통 묘지 천지이다. 지역별 묘지 구역 표시가 있어 오래전부터 모슬포와 대정 일대 마을 사람들이 이용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묘지로 둘러싸인 모슬봉에 오르다 보니 이전에 이따금 찾아갔던 망우리 공동묘지가 생각났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도로가 잘 되어 있어 걷거나 조깅하는 사람이 자주 찾을 정도로 공원이 되었다. 사실 산 자와 죽은 자는 가까워야 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묘지가 가까이 있는 것을 기피하고 있으나 제주도에는 묘지가 밭 한가운데나 집 바로 옆에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모슬봉 정상에 오르니 산방산과 바다가 가까이 보였다. 이곳에 묻힌 이들이 전망 좋은 이곳에서 늘 산방산과 제주 바다를 보면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슬봉 정상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하산길에 들어섰다. 하산길도 계속 공동묘지가 이어졌다. 차도에 들어서니 불그스레한 꽃이 피어 있었다. 가까이 보니 동백꽃이었다. 동백꽃은 짙은 빨간색은 아니고 핑크빛을 띠고 있었다. 동백꽃은 늦겨울이나 초봄에 피는 꽃이지만 이렇게 초겨울에도 피어 있었다.

 

 

 

 

 

사실 제주에는 기온이 높아 꽃이 계절에 꼭 맞지 않게 피는 것 같다. 어제 송악산 부근 들판에서도 유채꽃이 만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주에서는 배추·무·감자 등 여러 밭작물이 초겨울까지에도 재배되고 있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올레길을. 한참 가다 보니 돌담 사이로 성모 마리아상이 보였다. 들어가 보니 천주교 공원묘지였다. 성모 마리아님의 간구와 보호로 이곳에 묻힌 이들도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

 

 

 

 

 

민가 밭과 주택 사이로 둘러싸인 돌담길을 걷다 보니 올레길은 가톨릭 정난주 마리아 성지로 들어갔다.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용의 조카며느리자 황사영의 부인이다. 남편 황사영은 중국 베이징 주교에 청원하는 백서 사건으로 대역 죄인으로 참수형을 당하고 부인과 아들은 유배길에 올랐다. 정마리아는 제주도 유배길에 젖먹이 아들을 추자도에서 떼어놓고 혼자서 제주도로 와야 했다.

 

   

 

 

 

한순간에 양반에서 노비로 신분이 급락했지만, 그녀는 천주를 믿고 신앙의 본분을 지켜 섬사람들을 감화시켰다고 한다. 오늘 올레길 내내 봤던 묘지의 마지막이 정마리아 묘라니 가톨릭 신자로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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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가톨릭교회가 정한 위령 성월의 달이다. 이 기간에 죽은 이를 찾아 기도를 바치면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정마리아 묘역 앞에서 주모경을 바치면서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했다. 묘역에서 간단히 요기를 마치고 올레길에 다시 나섰다.


올레길은 도로를 따라 한참 이어지다가 신평-무릉 사이 곶자왈로 이어진다. 평지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는 검은 현무암 바위와 돌들이 깔려 있다.

 

 

 

 

 

제주어 사전에 따르면 곶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과 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정의되어 있다. 제주에는 원래 곶과 자왈이라는 두 개의 다른 지형이 있다. 곶은 숲이고 자왈은 가시덤블 지역인데 곶과 자왈이 합쳐 곶자왈로 표기한다.

 

 

 

 

 

화산 폭발로 뜨거운 용암이 식어 형성된 바위 지형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지의류(미생물 공생체) 포자가 내려앉아 식물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단단한 현무암 지대이지만 곶자왈 지역에는 오랜 시간 동안 식물들이 공생하고 자라서 지금처럼 나무와 넝쿨이 암석 위로 엉클어져 있는 숲 지대를 이뤘다.

 

   

 

 

 

곶자왈 초입 숲길에는 크지 않은 나무와 억새가 주로 있었다. 숲길로 계속 들어가니 바닥에는 고사리 등 양지식물과 이끼 식물이 깔려 있고 초록 나무들도 빽빽이 들어서 있다. 암석 지대라 비가 오면 물이 금방 빠져 식물이 살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지만 나무들은 서로 뿌리를 내려 의존하면서 자라고 있다.


이곳 곶자왈은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으로 제주 올레에 의해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곶자왈 지역 여기저기에는 돌담 흔적들이 있어 한때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언덕길에 오르니 억새가 깔린 새왓(띠밭)광장이 나왔다. 그리 크지 않는 제주 억새는 민간의 초가지붕을 잇는 재료로 활용되어 왔다. 

 

 

 

 

다시 숲길로 이어지더니 이번에는 제법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숲이 나왔다. 고목들이 여기저기 널브려 쓰려져 있고 큰 나무들이 하늘을 덮을 정도로 원시 숲을 이루고 있다. 잠시 쓰러진 고목에 앉아 푸른 숲이 뿜어내는 청량한 공기를 마셨다.

 

 

 

 

 

곶자왈은 제주도의 허파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어떤 명분으로 든지 무분별하게 개발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한다. 일전에 제주 골프장 골프텔에서 숙박한 적이 있었다. 골프장이 들어선 지역은 곶자왈 지대로 숲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골프장 개발을 위해 숲이 많이 파헤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수의 사람이 이용하는 골프장 개발을 위해 곶자왈을 더 이상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1시간여를 걷자 곶자왈이 끝나고 민가가 나왔다. 큰 팽나무 밑 목재 데크에 올라앉으니 조그마한 연못이 보였다. 마을 이름이 무릉이라니 예사롭지 않다.

 

 

 

 

 

11코스 종점에서 스탬프를 찍고 무릉외갓집으로 들어갔다. 무릉 외갓집은 마을기업으로 카페를 운명하면서 제주 특산물을 팔고 있다. 젊은 직원들이 제주에서 생산되는 감귤 종류를 열심히 설명하면서 시식을 권유했으나 버스를 타기 위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올해 하반기부터 전직 휴가 중이라 사실상 집에서 놀고 있는 상황에서 제주 올레길 걷기는 나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한다는 것이 큰 위안거리이다. 사실 코로나를 핑계로 퇴직 전 하고자 했던 여러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주 올레길 완주 계획은 더디지만 진행 중이다. 그래서 올레길 걷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 소중하게 다가온다.

 

 

 

 

 

이번 올레길에서 앞으로 퇴직 후에 어떤 일에 부딪혀라도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그 성취에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작은 성취에 만족하려면 나 자신이 여유롭고 느긋해야 한다는 생각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동안 직장이나 가정에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주변을 탓하거나 조급하게 살아온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것의 성취에 만족하고 조급하게 굴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되면 퇴직 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해본다, 나에게 큰 위안과 충만함을 주는 올레길 걷기를 계속하면서 꼭 완주하리라 다짐해본다.

 

(2000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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